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운요호 사건 (문단 편집) === [[일본 제국 해군]]의 습격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ud4CIS.jpg|width=100%]]}}}|| || 운요호 || 1875년 5월 25일과 6월 12일에 일본 해군의 운요호와 다이니테이보호가 각각 부산에 도착했다. 운요호가 [[부산]]항에 오자 당시 '부산 훈도'였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358|현석운]]이 부산 주재(駐在) 왜관(倭館)을 항의 방문하여 군선 침투 사유를 물었고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 [[소령|소좌]][* 1845년 생. 메이지 유신을 이루기 위한 내전 과정에서 막부의 해군과 여러 차례 해전을 경험했던 나름 전쟁통이었다. 본래 정한파의 거두이자 같이 [[사쓰마 번]] 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파벌로 여겨졌지만, 운요호 사건에서 2년 후에 사이고가 반란을 일으켜 발생한 [[세이난 전쟁]]에서는 메이지 정부군의 편을 들었고, 이후 승승장구하여 최종 계급이 해군 [[원수(계급)|원수]]까지 도달하였다. 1894~1895년의 [[청일전쟁]]이나 1904~1905년의 [[러일전쟁]]과 같은 굵직굵직한 전쟁에서는 직접 지휘관으로 참전하지 않았고, 1929년에 사망하였다.]는 '[[일본]]과 [[조선]] 간의 상호 통상을 위해 방문하였으며 조선의 해안을 탐사하러 왔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 두 척의 함선은 부산 앞에서 포격 연습을 하며 무력 시위를 하였고, 심지어 운요호는 동해안을 측량하고 [[영흥만]]과 [[영일만]] 일대에 상륙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조선이 무력 시위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조선이 도발에 넘어가서 먼저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듯한데, 조선은 일본의 의도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미 고종으로부터 일본과 다툼거리를 만들지 말라는 명을 받고 있었던 부산의 관리들은 먼저 일본 함선을 공격할 의사가 없었고, 조선 조정은 무력 시위 이후에 일본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이후에도 협박이 있을 때마다 양보해야 한다며 일본에 무대응으로 일관하여 교섭을 결렬시켰다. 사실 일본의 판단과는 다르게 남의 나라에서 허락없이 무단으로 측량을 하는 것은 서양의 국제법에서도 불법이기 때문에, 만약 이때 조선이 공격을 했어도 나중에 조선이 외교적으로 불리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강화도]]에서 2차 도발을 할 때는 수법을 바꾸어 식수를 얻으러 왔다고 둘러댔는데, 이 식수 부분조차도 후술된 것처럼 일본의 [[주작]]으로 판명되었다. 부산에서의 1차 무력 시위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운요호의 함장 이노우에는 해군성에 조선 침략을 건의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운요호를 [[일본 열도]]의 최북단에 있는 [[홋카이도]]로 배치하려고 하였다. 홋카이도로 가는 도중 해군에 탄원을 한 이노우에는 결국 해군대보 가와무라 스미요시로부터 운요호의 목적지를 청나라의 [[잉커우]][* [[요동 반도]]에 있는 국제항. 제 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청이 서양에 개항하게 된 항구 중에 하나였다.]로 변경한다는 허락을 얻어낸다. [[9월 20일]] 운요호는 잉커우로 가는 길에 굳이 현재의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도달했다. 이노우에를 포함한 일부 승조원들이 단정을 타고 강화도의 [[초지진]]으로 접근하였는데, 때마침 경계를 서고 있던 [[조선 수군]]이 [[일본군]] 단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단정을 향해 돌아가라고 명령과 함께 경고 포격을 가하였고 단정은 이에 맞서 [[소총]]으로 응사한 후 운요호로 돌아갔다. 운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본 내부의 의사 결정 과정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전말을 알기 어려우나, 일본의 역사가들은 마치 [[루거우차오 사건|노구교 사건]]에서의 [[무타구치 렌야]]처럼 해군 내부의 일부 강경파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본다. 반면에 한국의 학자들 중에는 행간의 맥락을 추정하여 메이지 정부의 고위 각료들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사건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오쿠보 도시미치]]가 운요효 사건 이전에 해군대보를 여러번 만났었다 (논의 내용에 대한 기록은 없음)' → 오쿠보가 해군에 운요호 사건을 지시했다,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자 [[기도 다카요시]]가 국가에 큰 일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급진개혁파+수구파 연합이 요구하던 정부 구조 개편을 취소시켰고, 이에 분개한 기도의 반대 세력이 사직했다' → 기도가 국정 장악을 목표로 운요호 사건을 계획했다, 등등. 당시 일본 정부의 명목상 최고 직위에 있던 인물은 태정대신인 산조 사네토미였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오쿠보와 기도가 쥐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